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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번호 48 |
등록일 : 2003-02-20 오후 9:1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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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의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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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허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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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색깔은 연한 연두색이며 병아리 같은 노랑색이다.
봄의 소리는 졸졸대는 물소리이고 짝짓기에 여념없는 새소리이다.
봄의 냄새는 쌉쌀한 봄나물 같은 풀 냄새이이고 흙냄새이다.
봄의 햇살 속에는 잘게 부순 얼음가루가 섞여있는 듯, 내려쬐는 햇살은 가루의 눈부신 반사와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은 그런 봄날이다.
우리 집에서, 바다를 건너 마주 보이는 산을 방문하기로 했다.
영하의 온도로 떨어지는 날이 드문 아일랜드에, 그래도 한겨울 추운날이면 그 산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중턱까지 내려 덮였고, 그러기를 두세 차례의 경험을 한 산이다.
먼발치에서나마 내게 눈을 보여준 산이다.
바로 집앞의 바닷가를 산책하자고 했더라면 난 그냥 집에 혼자 남아있는 시간을 차라리 선택했으리라.
산에서 태어나고 산에서 자란 나 이기에 "산" 이라는 단어는 더없이 내게 포근한 정감을 느끼게 한다.
강아지 두 마리를 트렁크에 싣고, 데이빗의 누이 메리는 샌드위치도 만들었다.
오늘만큼은 찬란한 봄날이지만 긴 겨울을 지낸 들판과 산은 아직도 질퍽거리므로 산행을 준비하는 우리들은 장화도 챙겨야했다.
산행에 무슨 장화인가! 뱀도 없는 나라라면서....
산이라고 해서 나무가 울창한 우리 한국의 산이라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이곳 아일랜드의 산은 높은 등성이고 구릉이다.
대부분 구릉의 산에는 양떼들이, 돋은 잔디를 먹으며 흩어져 살고있고, 곳곳에 박힌 바위들과, 고사리나무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 산을 이루는 풍경이다.
잔디들은 양떼들의 먹이감이 되어주느라 시달림 때문에 자랄 새가 없어서인지 무척이나 짧고 가늘다.
또한 산에는 이놈들의 동글동글한 배설물들을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산에 나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듬성듬성 흰 가시나무가 조화 (artificial)같은 빨간 열매를 대롱거리며 이정표처럼 서 있다.
30분 거리를 주행하여 코므라 (Comeragh) 산 입구에 도착했다.
트렁크에서 강아지들도 꺼내고 장화도 꺼냈다.
바짓가랑이를 접어 검은 고무 장화속에 집어넣어 신고, 색 바랜 주홍색 플리스 윗옷을 목까지 지퍼를 올려 잠그고 보니, 내 옷매무시에서 한가지 빠진게 있는 듯 하다.
수건이다.
머리에 수건만 둘러메면, 봄철 영락없는 모 심으러 논밭에 나가는 시골 아낙네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포근해서 나른하기까지 한 늦봄, 새참을 나르던 내가 살던 동네의 이웃집 여인들이,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흑백이 되어 되살아난다.
내 고향에서는 새참이나 중참을 "땟거리" 라고 불렀다.
땟거리 속에는 꾹꾹 눌러 담긴 하얀 쌀밥이 불룩한 무덤모양으로 담아져있고, 돼지기름이 둥둥 뜬 붉은 김치국도,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구이도 있었다.
동네 모심기가 있는 날이면, 할머니를 따라, 논두렁 풀밭에 앉아 땟거리를 얻어먹던 생각이 간절해진다.
개울물을 지나고, 젖소들이 풀을 뜯고있는 질퍽한 들판을 건넌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송아지도 엄마소 옆에서 한가로워하고 있다.
들판의 중턱에 이르니 위쪽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웅덩이 안에는 수백마리쯤 되어보이는 개구리 알들이 덮여있다.
산을 올랐다. 아니 차라리 언덕을 올랐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이겠지만 명색이 산 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 아니던가.
그것도 산이라고, 중턱쯤에 이르니 숨이 차고 힘이 부친다.
종종 만나는 양떼들은 우리를 보고 흠칫 놀라 달아나곤 한다.
오르던길을 멈춰서서 뒤돌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녹색의 에메랄드 초원과 하늘이 맞닿았고, 파란 하늘과 흰구름, 녹색초원과 듬성듬성의 집들이, 혼합하지 않은 순수한 색깔로 그린 한폭의 그림 같다.
정상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궁시렁대다 드디어 다다랐다.
전에도 와 본적이 있는 산이지만 몇 년만에 다시 찾는 길이어서 내 굳은 근육이 단련되어 있을리가 없다.
정상에는 호수가 있다.
몇 년 전에 보았을 때처럼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었다.
이 호수는 언제부터 이곳에 이렇게 있었을까!
호수 주변으로는 납작하게 깎아만든 바위들을 모아, 병풍을 만든 것처럼 호수를 감싸고 있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양 한 마리가 물에 빠져 죽어있었다.
여우나 까마귀들의 밥이 되고 난 양은, 뼈와 여기저기 흩어진 양털만 남아있기도 하다.
찬 바위에 걸터앉아 원형의 작은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진한 회색의 바위색을 투영한 호수는, 남색 빛의 유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쫘악 펼쳐놓은 남색 비단 같기도 하다.
저 검은빛에 가까운 남색 속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엑스칼리버의 긴 검이, 안개가 자욱하고 달빛이 환한 그런 밤이면 호수 한가운데에 쑤욱 올라오진 않을까!
둘러쳐진 바위속의 웅덩이진 호수에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전설이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 * * * *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마을에, 정의롭고 용감하고 잘 생긴 청년과, 마음이 따뜻하고 깊은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처녀가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들이 사는 마을 언덕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둘은 이 호수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또 사랑의 맹세를 하였다.
이 작은 호수에는 사나운 물결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비가오나 가뭄이 드나 물은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게 늘 한결같아서 그들의 사랑도 호수처럼 한결같이 변하지 말자고 그곳에 맹세하였다.
어느 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의 청년들은 징집되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깊은 눈과 사랑에 빠진 청년은 꼭 살아 돌아와서 이 호수옆에 집을 짓고 한결같은 사랑을 하며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살자고 약속하고 처녀를 떠났다.
전쟁은 몇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가난과 돌림병으로 죽어나갔고 마을은 황폐해갔지만 처녀는 청년을 기다리는 일념으로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청년의 용감함은 왕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왕은 그 청년에게 부와 권력을 포상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포상을 받아들임과 함께 공주와 결혼해줄 것을 청했다.
청년은, 호수와 깊은 눈매의 처녀를 생각하고 잠시 괴로워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매혹적인 현실은, 지나간 추상적인 한낱 꿈과 약속을 능가하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것이 고향에는 깊은눈의 처녀와 호수외에는 자신의 야심을 펼만한 아무런 건더기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왕의 호의를 모두 받아들였고 야심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끝내 호수가 있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청년은 늙은 노인이 되어있었다.
노인은 쇠약해진 몸처럼 마음도 쇠약해졌고 쇠약해진 마음속에는 젊은날의 호수와 깊은 눈의 처녀를 떠올릴만한 공간을 만들어줬다.
노인은 죽기전에 고향을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긴 원정에 나섰다.
마을에 다다른 노인의 눈에는, 마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언덕에 한두채의 오두막만 듬성듬성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오두막 주인에게 깊은 눈의 처녀에 대해 물었다.
오두막집 노인은 마을의 전염병과 굶주림을 얘기했고, 깊은 눈의 처녀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처녀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살아남았지만 매일 저 호숫가에서 청년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처녀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사람들은 정의롭고 용감한 청년이 공주와 결혼을 했고 부와 권력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그를 부러워했다.
그 말을 듣는순간 깊은눈의 희망과 사랑은 호수에 영원히 뭍혀버렸다.
어느 봄날 얼음가루가 섞인듯한 눈부신 햇살이 퍼지던날 처녀는 심장이 굳어 호숫가에 앉은채로 죽었다고 했다.
처녀가 죽은 그 자리에 처녀는 묻혔고 그 처녀에게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청년이었던 노인은 죄책감과 비통한 마음으로 호숫가 주변을 돌다 양치기 청년을 만났다.
깊은 눈매를 가진 청년이었다.
노인은 넋이 나간 체 양치기 청년을 바라보았으며 청년은 노인에게 눈부신 봄햇볕이라고 깊은 눈매로 인사를 하고 총총히 양과 함께 멀어져갔다.
노인은 그 깊은눈의 양치기 청년에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수에는 깊은 눈의 넋이 담겨있다.
누구든 그 슬픈 넋을 건드리는 돌을 호수에 던지면 그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여 신성하게 대해야 한다고 전해온다.
* * * * *
싸온 샌드위치도 먹어치웠고, 볼 것도 다 본지라 이제 산을 내려갈 때가 되었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개구리 알이 모여있는 웅덩이에 멈춰서서 데이빗은 알을 채집한다.
집 연못에 풀어 놓을 거라고.
다시 지나왔던 들판을 걸으며 파릇파릇한 풀 속에 혹 내가 알고있는 봄나물이라도 있을까 눈 여겨 찾아본다.
지금쯤 내 고향에는 쑥이랑 달래랑 냉이들이 파릇하게 새싹을 돋우고 있을텐데, 왜 이 아일랜드에는 그 흔한 쑥도 없는가.
밭두렁에 앉아 파릇파릇 돋아난 향긋한 쑥을 내 좋은 친구와 캐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바구니를 옆에 놓고 작은 과일칼로 밑동을 싹둑 잘라내고 덤불을 털어 내 버리고 바구니에 담는다.
그렇게 쑥 바구니는 수북히 쌓이고 내 좋은 친구와의 두런두런 얘기보따리도 수북히 쌓여간다.
해가 뉘엇뉘엇 할때쯤이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우물가에서 찬물 세례를 받은 쑥들은 톡톡 다시 살아나는듯 하다.
묽게 푼 된장에, 파릇한 쑥을 푸짐히 넣오 푸욱 끓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 눈부신 봄날은, 봄나물과 밭두렁, 웃음도 고민도 모두 섞인 정다운 사람들과의 얘기보따리가 생각난다.
이렇게 눈부신 봄날은, 묽게 푼 된장국에 푸짐한 쑥국 한사발의 추억이 몹시 먹고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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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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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오전 6:55:42  |
신영! 오랜만에 아일랜드를 방문하는 느낌입니다. 글속에 깔려있는 청순함,깻끗함 그리고 순수함이 봄날의 전설을 주옥같이 아름다운 한편의 글로 느끼게합니다. 전에도 느껴온것이지만 언어에대한 감각이 자연스럽고 섬세하면서도 순박하여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읽을수 있는 즐거움을 주고있읍니다. 그리고 있는그대로의 아일랜드의 자연을 느낄것 같읍니다.
신영! 좋은글 많이 쓰기바라면서.......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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