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41  등록일 : 2002-10-20 오후 8:17:25

목소리 큰 의사 이야기
글 : 허신영 ()

내가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고 힘든 노동같은 일이어서 영어에서는 Labour 라고 부른다.
그래서 분만실을 "Labour room" 이라고 한다.

나는 아이 둘의 어머니 입장에 있으나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수술을 해서 낳은 아이였으므로, 짐승처럼 울부짖는 산모의 고통의 절정은 달해보지 않았으므로, 뭇 어머니들 앞에서 아기낳는 고생을 했다는 말 할 때는 여간 조심스럽다.

하여간에,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어서 분만 후 뇌세포가 엄청나게 죽어나간다고 하지 않던가.
나 역시, 자연분만은 아니었지만 전신마취로 수술을 한 후유증은 나를 멍~ 하게 만들었으니, 감히 해산후의 뇌세포, 건망증의 신드롬은 자연분만한 산모들에 버금갈 정도였다.

나의 뇌세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있는 그대로 있어줘도 모자라는판에, 전신마취는 나를 때론 틀림없는 '형광등' 으로 둔갑시키곤 하였다.
그 마취약은 수천마리 뇌세포를 잡아먹긴 했나보다.

출산 후 의 엄마들은 자주 뭔가를 깜박깜박 잊거나 잃어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내게서 태어난 새 사람이 조금씩 미소를 지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치의에게 (아마도 아이 백신 때문이라고 기억한다) 들렀다.

우리집 주치의인 Dr.윌슨은 목소리가 크고, 키가 작고, 겸손하며 친절한 50대의 남자의사였다.
내 이름을 외우기가 힘이 든 것인지 아님 나에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것인지 나를 호칭할때는 항상 '미세스 쉬한' 이라고 하는 의사였다.

환자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간이침대가 놓인 빼곡한 진찰실 문을열고 들어서자 "헬로우 미세스 쉬한"이라고 의례 그 목청 좋은 목소리로 회전의자에 앉아 나를 맞이한다.
곧이어 날씨가 춥다커니 덥다커니 괜한 날씨를 불평하다 아이의 백신에 들어갔다.

백신주사를 맞추고 폴리오(polio)도 입에 한방울 떨어뜨려지고 난 후, 나는 아이를 어르고 추스르며 의사를 향해 아주 약간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닥터!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요"

목소리 큰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 "그럼 어서 말해봐요" 라고 그나마 좀 더 강세를 주어 말했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가 물으려던 질문이 깜깜할 정도로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문제됐었고 답신을 줄만한 사람은 의사라고 생각해 준비해온 질문이었는데.
아예 진찰실에 들어설때부터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다지 어이없을 것도 없었겠지만,
하필 질문이 있다고 말이 채 끝난 후 이렇게 그 질문이 어둠속에 사라져버렸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무슨 질문일까를 기다리다가는 재차 말했다.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봐요"

그렇다고 '내가 질문하려는 걸 깜빡 잊었어요' 라고 말하자니 얼마나 한심한 여자이고 한심한 노릇인가 말이다.

나는 대답대신 살짝 웃고는 "아~아~ 다음에...."라고 미국서 산다는 박아무개 흉내를 내고 있었다.

목소리 크고 친절한 의사는 내가 얼굴까지 빨개지며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고있으니 나를 안심시켜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포기하려 들지 않고 또 물었다.

"괜찮아요. 어서 말해봐요"

나는 당혹스러워 점점 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도저히 내가 무슨 질문을 하려했었는지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의사의 "괜찮아요" 라는 말을 덩달아 따라하며 "다음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고 쑥쓰러운 웃음을 짓고서는 얼른 이 진찰실에서 빠져나가기만을 바랬다.

괜찮으니 말하라커니, 괜찮으니 다음에 얘기하겠다커니 한참을 옥신각신 하던 끝이었다.

갑자기 목소리 큰 의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도 생각해낸 사람처럼 그나마 더 한 층 볼륨이 커진 목소리를 내게 말했다.

"아!!!! 알았어요. 무슨질문인지"

"네?"

어리둥절해진 나는 의사의 눈을 맞대고 쳐다보았다.
목소리 큰 의사가 말했다.

"피임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거였죠?"

"아? 네?"

생각지도 않은 피임이라니. 나는 아직도 내 질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질문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 의사의 말에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맞다' '아니다' 라는 말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아니다"라고 말하자니 의사는 또 재차 그럼 뭐냐고 물을테였고 "맞다"라고 하자니 그건 내 진짜 질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그 상황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 큰 의사는 나의 웃음을 "맞다"라고 확신했는지 피임의 종류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큰 목소리로 말이다.

"우선 가장 널리쓰이는 콘돔을 들 수가 있겠구요. 루프도 있고 피임알약 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주억대며 '제발 저 목소리 좀 줄여줬으면...저 대기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리겠네...' 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대기실 사람들한테 온통 신경이쓰여 의사의 말은 내 귀가 아닌 머리위로 스쳐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 스치는 왕왕 소리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한참을(짧은 순간이었겠으나 내겐 한참이라고 느껴졌다) 피임제품 설명하던 의사가 잠시 말 중간에 쉼표를 찍는 사이에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대꾸했다.

"잘 알았어요. 집에가서 생각해보고 다음에 결정하도록 할께요."

피임! 그것이 내 질문이었던 아니던간에, 아무리 우리 가족의 주치의라지만 50대의 남자와 피임을 상의한다는 것이 내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자니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더욱더 후끈해진 얼굴을 어중간한 웃음으로 희석시키려 애를 먹고 있었다.

드디어 의사의 피임 설명은 기어이 한마디 덧붙인 후에 끝을 냈다.
"남편과 상의해보고 다시 와서 결정하도록 하세요."
"네, 물론이지요. 감사합니다." 의사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의 기회를 주지않기 위해서 나는 감사합니다 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진찰실을 빠져나오니 그나마 눌러 참고있었던 웃음이 삐죽삐죽 입가로 흘러나왔다.
혹 대기실 사람들이 피임설명을 듣기위해 온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하진 않을지 무안한 마음에 그 문 앞을 재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건물을 나섰던 일.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을 그 무엇에 비교할까.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자! 온 혼과 마음의 기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 중노동이다.
내 기력이 혼미하여 생겼던 우스운 에피소드였으나,
새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후유증을 사실 자랑스러워해도 모자랄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던 나!
지금 돌이켜볼 때 바보스러웠다기 보다는 순수했다고 표현하고 싶다.

"세상의 아기낳은 여성들이여. 산후 후유증은 훈장보다 더 가치있는 일,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말하자"

그나저나 그때 내가 의사한테 하려던 질문이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걸 보면(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나의 뇌세포는 그 이후로도 전혀 소생되지 못했나보다.

그리고 아~아~ 로 말머리를 시작하기로 유명한 야구선수라는 인물도, 분만의 고통에 견줄만한, 우주를 탄생시킬만한 경험을 남몰래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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