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전에 소개했던 우리 집 레놀을 떠나보내고 새 옥타비아를 맞이한 소식
을 전하려해요.
레놀이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지지난 토요일 크리머리(Creamery, 우리나라 농협 같은 곳)에 가스통을 사러 갔다가 오는 도중 지쳐 늙고 힘에 겨운 레놀은 드디어 완전히 멈추고 말았어요.
다행히 동네 사람을 만나 밧줄로 레놀을 묶어 집까지 끌고 올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끌려가는 레놀 속에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요. 그리고 집에 와서 하루종일 데이빗은 엔진 뚜껑을 열어제치고 부품까지 사온 뒤 뚜덕뚜덕 고쳐놓았어요. 그렇지만 엔진이 워낙 많이 손상돼 언제 멈출지 모르니 나한테 차를 쓰지 말라고 하네요.
차를 쓸 수 없으므로 월요일 아침 할 수 없이 주미는 유치원을 빠져야 됐어요. 그 날 저녁때가 돼서 레놀 때문에 좀 늦어질 것 같다며 7시까지는 오겠다는 데이빗 전화를 받았어요. 나는 우선 레놀이 걱정되었어요.
퇴근길에 멈춰버리는 건 아닌지.
"차는 어때요?"
"괜찮아"
"내일 내가 쓸 수 있을까요?"
"응, 써도 될 것 같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낡고 덜거덩거리는 차를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고쳐 쓰게 생겼구나 싶으니 데이빗이 참 대단해 보였어요.
6월이지만 날씨는 싸늘하리만큼 안개가 자욱히 꼈고 내일쯤이면 또 한바탕 비가 올 것 같아 나는 비 설거지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어요. 차고를 열고 그 속에서 론모워(잔디 깎는 기계 Lawnmower)를 꺼내 시동을 걸고는 열심히 잔디를 깎아요. 잔디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데이지 꽃들도 잔디와 함께 깎여 버려 안타깝지만 모래쯤이면 모질도록 생명력이 강한 이 꽃들은 다시 하얗게 녹색 잔디 위를 수놓을 거예요.
들풀 데이지는 생명력 뿐 아니라 번식력도 강해 잔디 위에 한번 뿌리를 내렸다 하면 서서히 서서히 잔디를 점령해 가며 결국은 잔디밭을 죽이기도 하지요. 난 그래도 녹색 잔디만 있는 것보다는 올망졸망 피어있는 데이지 꽃이 군데군데 장식하고 있는 자연스러움을 더 좋아해요. 그 잔디에서 주미와 죠슈아는 데이지(Daisy), 단딜리온(Dandelion 민들레), 노랑 버터컵(Buttercups 미나리아재비), 토끼풀 꽃들을 한줌씩 꺾어 "엄마, 선물" 하며 내밀곤 하지요.
꽃을 꺾어와 내게 내미는 모습들도 귀엽지만 잔디밭이나 집 뒤쪽으로 나있는 초원 위에서 들꽃들을 꺾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 더 귀여워요. 난 아이들이 꺾어온 꽃들을 아주 작은 유리 화병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아요. 죠슈아가 꺾은 꽃들은 꽃 머리만 동강 잘라와 꽂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 작은 손안에 들어있는 희고 노란 꽃들을 보면 마냥 마음이 너그러워져요. 우리 옆집처럼 깔끔한 사람들은 제초제를 뿌려 티끌 하나 없고 보드라운 잔디 정원을 만들어 놓지만 데이빗이나 나나 될 수 있으면 독한 화학 약품들은 쓰기를 꺼려해 우리 집 정원은 항상 그대로 방치돼 있는 편이에요. 그래서 우리 집 정원은 이런 저런 풀밭도 되고 잔디밭도 되고 그래요. 사실 데이빗이 잔디에 관심이
많았더라면 비료도 주고 잘 가꿔 윤기 나는 잔디밭이 돼 있겠지만 그는 나무들을 더 좋아해서 잔디 주위로 나무와 꽃들로 꽉 메워놓고 그것들에게만 신경을 쓰는 편애 때문에 우리 집 잔디는 대접을 못 받지요.
레놀을 소개 할 때도 말했듯이 데이빗은 대단히 실질적이고 이성적인 사람 이예요.
커다란 잔디밭을 만들어 놓고 일주일에 한번씩 깎아야 하는 노동력과 휘발유는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잔디 주위로 나무(shrubs)들과 다년생 화초들을 빙 둘러 심어 해가 갈수록 잔디는 줄어들고 나무와 꽃으로 덮게 하려는 속셈이지요.
잔디를 깎다 경적 소리가 빵빵 울려대서 뒤돌아 봤더니 번쩍번쩍 윤이 나다 못해 빛을 발하기까지 하는 청색 차 속에서 데이빗이 웃고 있네요. 자전거를 타고 놀던 죠슈아의 첫마디
"Daddy, New Car!" 두 살짜리 죠슈아는 환호성이라기 보다는 너무 놀랐는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요. 나도 처음에는 저 양반이 출장 간다는 말은 안 했으니 렌트카는 아닐 테고.... 의심스러웠죠.
그렇게 해서 레놀과는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어요. 다만 레놀에 붙어있던 L자 스티커만 띠어 왔네요.
번호판에는 00(2000년의 끝 두개 숫자)이라고 시작돼있고요. 이곳에서는 자동차 출생 년도가 번호판 맨 앞에 기입돼요. 나야 물론 00이라고 찍힌 번호판들을 소 닭 보듯 시큰둥하니 보아 왔었는데 이제 더 이상 시큰둥할 일이 아니지 뭐예요. 당장 트라모어로 시범 운전 해 봤고 올 때는 내가 대신 운전했어요.
이 자동차 이름은 SKODA회사에서 만든 OCTAVIA라고 해요. 티내고 발음하면 옥테이비아.
난 이렇게 좋은 차는 처음 운전해 봐요. 레놀은 두세번 그것도 온 힘을 다해 문을 내 질러야지 만 닫혔는데 옥타비아는 문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닫히는 거예요. 그래도 습관이 안돼서 나는 여전히 세게 밀어 닫곤 해요. 레놀은 기어를 조금이라도 늦게 바꾸면 얼마나 소리를 질러대든지 마음이 불안했는데 옥타비아는 내가 기어를 바꿀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만 해요. 이곳은 거의 다 수동 기어를 사용해요. 또 레놀은 엑셀레이더, 클러치,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야만 말을 들었는데 옥타비아는 발을 올려놓고 살짝 눌러주기만 하면 움직이는 거예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해요.
차안의 온갖 스테레오 시스템도 신형이어서 어안이 벙벙해져요.
"데이빗, 라디오 스위치가 어떤 거예요?"
"응, 이 파란 단추, 이 차는 여자들도 쓸 수 있도록 아주 작동법이 간단하지"
데이빗은 이 말을 해놓고 내 눈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요. 나도 살짝 한번 째려보고요.
데이빗은 이런 농담을 잘 해요. "응, 이건 여자도 알 수 있어" 라는 식의.
옥타비아는 그 중에서도 운전대가 얼마나 부드럽게 돌아가는지 위험할 정도에요
아무리 한겨울이래도 주차할 때와 U턴할 때만큼은 등이 후끈하고 얼굴이 시뻘게지며 레놀의 운전대와 씨름을 했었는데 옥타비아는 거의 한 손으로도 힘 안주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주미와 죠슈아도 마냥 좋아하고 차는 차일 뿐이라던 데이빗은 차 속이 애들 신발에 더럽혀질까봐 야단이에요.
"David! You used to say It's only a car."
"Not anymore"
우리 둘 다 하하.
이렇게 옥타비아는 옛날 레놀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좋은 차이지만 그래도 난 왠지 가슴 한구석이 찜찜해요. 레놀은 워낙 내 손에 길들여졌고 그래서 전혀 부담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는데 손톱자국이 날까봐 제대로 건드려보기도 망설여지는 새 옥타비아는 쉽게 정이 안 가는군요. 레놀을 내주고 옥타비아의 가격에서 레놀 값을 조금 뺐는데(Scrapage Deal) 레놀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폐차시켰다는군요. 나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든 레놀이 다른 사람 손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면 그래서 시내에서 만나게 된다면 마음이 영 안쓰러울 것 같아서요.
며칠째 옥타비아를 운전하고 다니는데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있어요.
나는 새것을 맞이할 때마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곧잘 생각나곤 해요.
한 여름이면 5일장을 다녀오신 할머니는 대나무 살로 만든 종이 부채를 사오곤 하셨어요. 지금도 그런 부채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부채에는 예쁜 김 창숙이나 한 혜숙 같은 배우들이 은빛 금빛으로 단을 박은 곱디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근 한 자는 될법한 옥비녀를, 틀어 올린 뒷머리에 가로지르게 꼽고는 하얗고 고른 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함박꽃처럼 웃고있는 사진이 담겨있었지요. 그렇게 예쁜 사람들은 매일 그렇게 차려입고 그렇게 웃고 앉아있는 줄만 알았어요. 나랑 언니는 그런 흠집 하나 없이 희고 깨끗한 새 부채를 받아들 때마다 그곳에 담겨있는 예쁜 얼굴들과 화려한 한복을 한참씩이나 들여다보며 남모르게 동경했었지요. 그러면서 작게나마 나만 알 수 있는 다
짐을 하곤 했어요. 이 부채는 손잡이(대나무 꼬챙이)만 조심히 잡고 "절대 찢기지도 더럽히지도 않도록 해야지" 하고요. 그렇게 하루 정도는 사용한다기보다는 관망만 하다가 이틀째쯤 해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잡이만 겨우 잡고 바람을 일으켜 보는 거예요. 그렇게 쓰다보면 서서히 아주 서서히 알게 모르게 때가 타기 시작하지요. 힘있게 부채를 쥐려면 엄지손가락으로 부채 종이를 지탱하면서 잡아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예쁜 배우가 입은 한복의 치맛자락쯤에서는 어느새 구멍이 나 버리고 그때부턴 너덜너덜 거리는 건 시간문제예요. 결국 너덜거리는 부채로 형세가 바뀌면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오히려 그 부채를 부담 없이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어서 편했었던 기억이 나요. 종이 부채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할머니는 5일장에서 다시 한복 입은 예쁜 여자들이 담긴 부채를 사 오셨구요. 그러면 다시 나는.... 이런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네요. (옛날 얘기를 들먹이니 내가 마치 꽤나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지는군요.)
이 옥타비아도 세월이 가서 부담 없을 정도가 됐으면 내 마음이 오히려 편해질 것 같아요.
내가 레놀과 옥타비아를 비교해 말했는데 레놀이 성능이 안 좋은 차여서가 아니고 단지 워낙 오래되고 낡아서 그런 것일 뿐 좋은 차였어요. 그리고 옥타비아의 성능은 한국의 여니 차들만큼의 수준이겠지만(여러분들은 진작부터 써왔을) 나는 새 차를 운전해 본적이 없어서 고급스럽게 느껴진 것일 뿐 옥타비아 역시 서민들이 쓰는 평범한 차 일 뿐이에요. 머씨디스(Mercedes 스페인식으로 발음하면 메르세데스)나 데이빗이 늘 동경하는 차 BMW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스코다에 관한 한마디.
스코다는 체코 공화국에서 만들어내는 차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형편없는 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는군요. 워낙 품질이 안좋아서 스코다에 관한 농담들이 많았었데요. 예를 들어,
"스코다 차 뒷유리에 난방장치가 돼 있는 이유는?"
"차를 밀고 갈 때 손이 따뜻하라고"
얼마나 고장이 잘 나면 이렇게 아예 밀고 다닐 일을 생각해 놨겠어요.
"스코다 차를 가치 있는 차로 만드는 법은?"
"휘발유를 가득 채워놓는 것"
볼스바겐(VolksWagen "사람들의 차" 라는 뜻의 독일 차)이 스코다 회사를 사들여 스코다의 엔진은 볼스바겐의 엔진이라고 하는군요. 워낙 명성 아닌 명성을 날린 차였고 그래서 홍보를 위함인지 다른 차들보다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어요. 작년에는 스코다의 옥타비아가 The Car of the Year 선발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군요.
참고로 스코다 옥타비아 값은 14,500파운드. 성능이나 외모는 거의 볼스바겐의 파삿(Passat)하고 비슷해요. 생김새가 한국의 소나타하고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올해도 역시 스코다에서 만든 훼비아(Fabia) 가 1등을 차지했다네요.
데이빗은 옥타비아를 사놓고 빈털터리가 됐다고 죽는소리를 해요. 통장에 겨우 몇 백 파운드만 남았다고요.
먼지가 껴서 번호판이 안보일 정도여도 세차 한번 안 하던 데이빗이 며칠전 옥타비아에 호스를 대고 씻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아마 그것이 옥타비아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거에요. 워낙 차를 안 닦고 다니는 사람이어서.
주미는 덩달아 옆에서 깡충대다가 장난감 물조리 통을 새 차에 대고 문지른 결과 보기 좋은 전위예술? 같은 무늬를 만들어놨지 뭐예요.
백 점 엄마라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래, 너도 이런 상처가 날줄 모르고 그런 일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아가야. 차일 뿐인데"
하지만 나 같은 빵점 엄마. 격한 목소리로.
"주미, 네가 한 꼴을 좀 봐. 새 차에 이게 무슨 짓이야. 이리 와서 네가 한 짓을 보라구. 내가 못살아 정말이지. 새 차 한번 샀더니 그 꼴을 못보는구만 "
데이빗은 연신
"This is unreal unreal..... I just can't believe it"
우리 레놀만 같았어도 조금 긁혔다고 어디 티나 냈겠어요? 그리고 티가 난들 누구 하나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을 텐데, 어디에 가치를 얼만큼 주느냐에 따
라 이렇게 달라지는군요.
그러나 나는 잘 알아요. 데이빗이나 내 성격에 이 가치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레놀을 그리는 마음에서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합니다
워터포드에서 허 신영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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