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그동안 심리학을 맛보며 이래저래 느끼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한 글이다.
나와, 생각과 성격이 많이 비슷한 너를 생각하며 오늘 이 글을 써 나아간다.
너와 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아니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편안한 삶, 즉 행복한 삶을 살고싶어하며 또한 행복해질 권리가 우리 모두에겐 충분히 있고도 남는다.
바로 그런 만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 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내 글이 아주 작게나마 그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힌트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아주 간단하고도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오랫동안 해답을 구하고자, 나를 찾고자 하였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방대한 질문에 앞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싶은가!"라는 질문이 내게 먼저 다가왔다.
이 글을 읽고있는 너도 잠시 한번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 바란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싶은가?"
이 질문은 너도 알다시피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라는 뜻보다는 너는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매일 부딪치는 세상과 어떤 자세로 어떻게 타협(?)하며 살아가고 싶은가에 더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질문을 받는다면 너무 광범위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주 쉽고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 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너도 나와 여러 부분에서 아주 비슷한 성격을 가졌으니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싶었는지 내 생각을 예로 들어 말하려 한다. 아마 너에게도 동감을 불러일으키리라 생각하며.
나는 늘 이런 사람이 되고자 꿈꾸어왔다.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며 매사에 분명하고 재치있고 영리하며 박식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아름답고 섹시하고 부드럽되 강인하며 이 모든 나의 성격과 재능이 겸손과 예의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이타심이라는 바탕색으로 칠해진 사람이고 싶다고 말이다.
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테니 너는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런 나의 희망사항은 바로 내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결점이나 취약점(나의 희망사항의 정 반대의 것들)들은 대단히 확대되어 내 삶에 크고작은 장애물로 다가왔으며 나는 나의 희망사항을 모두 갖추게 될 때 비로소 나 스스로에게 만족해 할 수 있고 즉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극소수에 가까운 장점들은 이미 단점들에 억눌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장점이라 생각지 않고 그건 당연한 것이고 대단치 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정해놓은 이상형인 나의 희망사항을 갖춘 사람을 보게 될 때면 몹시 부러워하고 또한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하였고 자격지심을 갖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사람을 보기란 무척 드문일이었지만.)
마치, 눈이 아주 작은 사람이 자신의 눈이 커지기만 하면 남부러울 것이 없이 만족스런 얼굴모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눈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눈 여겨 보게되고 눈이 큰 사람을 만나면 단번에 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임의로 정해놓은 소위 내가 도달해야 할 "이상형"을 올라가지 못할 나무 위에 걸어놓고 오르지 못하고있는 나 스스로를 매일 못살게 굴었다.
나의 이상은 저 꼭대기 나무위에 있었고 나는 나무 아래 있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늘 모자라는 사람이었으므로 스스로를 박대하였다. 저 정도(이상형)가 될 때에서야 비로소 자심감을 갖을 수 있고 그제서야 감히 자신감을 가질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재수좋은(?) 날에는 착각속에 빠져 잠시나마 나무 꼭대기의 이상을 만났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혼돈 속에 살게 되는 설상가상의 형편이 되기도 하였다.
점점 나는 복잡해졌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 내가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런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았다.
나는 내 스스로 파놓은 미궁속에 빠져 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전혀 형태조차도 잡아낼 수 없었다.
겸손과 예의로 바탕색을 칠하고 싶었고 나머지 자신감과 성실, 당당함, 박식함, 부지럼함, 美, 강인함...등등을 구성물로 갖추어 완벽한 조화의 나를 이루어내고 싶었던 나는 그 중에서도 자신감을 가장 갈구하였다.
그렇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였다.
내가 원하는 이상형은 곧 내가 갖추지 못한 나의 단점들이었으므로.
나는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고 나의 이런 단점투성이들 뿐인 내가 자신감을 갖는다는 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둘도 없는 소중한 나의 친구야. 너에게 한가지 물어보자꾸나.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고 너는 생각하느냐!
아니 말을 바꿔서 자신이 없다는 건 어떤 경우를 말하더냐!
그래! 바로 그렇다.
자신이 없다는 건... 내가 알고있는 (혹은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없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감이란 꼭 내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마다 정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생기는 것이더냐!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바로 그것이 나의 단단한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자신감이란 "나의 겉과 속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밖으로 내 비췰 수 있는 힘" 바로 그것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니 굳이 나의 희망사항인 이상형을 나무꼭대기에 올려놓고 그 가까이에 접근할 수 없다고 자신없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시간낭비였는지 너는 내 마음을 이제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나에게 대단한 발견이었으므로 너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혼돈을 경험하였으므로 나에게는 값진 발견이 되었으되 너에게는 너무 쉽게 다가오진 않을지 그래서 너무 값없게 느껴지진 않을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너는 또 나에게 반문할 것이다. 내가 알고있는 나의 온전한 겉과 속모습이란 얼마나 방대하고 속속들이 몸속 마음속 깊은곳에 숨어있을진데 그걸 어떻게 찾아내고 알아내서 밖으로 내 비췰 수 있겠느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선 내 스스로 알아야지 밖으로든 안으로든 내 비췰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하고 답을 하였다.
나는 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렇게 안개속에 감춰진 나를 조금씩 헤쳐가며 알아가는 여정을 택하였다. 나는 나의 한 부분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의 동시에 나의 모르는 부분이 수십 가지로 불어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알면 알수록 내가 참말로 모른다는 사실들을 알게되었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 내가 안개속의 나를 찾아나선 여정 중, 새롭게 발견한 사실을 너에게 예로 들어보겠다.
우선 나는 얼마큼 "나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역시 나에게는 큰 발견이었다.
이 역시 자신감과 직결되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우선 귀띔해둔다.
"자신에게 충실하자" 라는 수험생들의 머리띠 구호처럼 흔히 늘 들어왔던,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은 이 말 뜻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니 사실 잘못 알고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 이란 뜻은 내가 맡은 직분이나 신분을 바로 알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나의 잘못된 해석에 따르면 나는 그럴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때도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야!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의 자칭 잘못된 해석을 혹 현재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잘못됐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니. (오히려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타심도 아닌, 타의 이목이나 입장을 생각하여 타인들과의 만남이나 부딪침에 있어서, 나 자신을 존중은커녕 깔아뭉개 버리며,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도덕적인 선이고 도리인 냥 생각하며, 그때그때 얻어지는 느낌에 속상해하고 흥분해하곤 하였다.
너도 이런 경험을 수도없이 많이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부딪쳐 이루어지는 삶에 있어서 마찰이 생기고 그로 인한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 당시에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분통해하고 속상해 하였던 일들 말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한가지 쉬운 예를 들겠다.
어떤 한 사람을 초대하여 정성스런 대접을 해 주었는데, 그 상대는 당연한 듯 아님 오히려 내 음식이 맛이 없다는 듯 다른 집에서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았다는 식의 비켜가는 언급을 했다고 치자.
나는 그 당시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석연치 않았지만 차마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내가 얼마만큼 정성을 들인 식탁이었는지, 나의 마음 상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아팠음을 그 자리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친구야! 너도 이런 비슷한 경험들이 수없이 많았을테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내 감정표현을 한다면 그가 무안해할지도 모르고 그 자리가 무색해져 버릴지도 모르니, 나 하나가 참으면 그만일 것을 하는 마음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않은가!
그렇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손님이 떠난 후 속상해하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울분해한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나는 나의 마음을 다치게 한 장본인의 마음은 존중하였으나 내 마음은 존중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마음이 다치도록 방치해두었으며 상대의 마음은 다칠까봐 조심스러워하였다.
바로 그렇다.
나는 내 마음이 다쳤다고 호소하는 그 소리를 못들은 척 무시하고 상대 혹은 그 주변환경을 더 염려하였으니 얼마나 내 자신에게는 소홀하였고 따라서 내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였는지 말이다.
이 얼마나 바보스런 일이란 말인가. 결국 그렇다고 상대가 나의 그 한량(?)없는 내 깊은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보람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뜻이 이제 어렴풋 무슨뜻인지 알것같지 않은가.
너는 또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남들앞에 내 음식솜씨 없음을 들먹이는, 자존심이 상하는 행위이므로 참았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말하는 자존심은 그것이 정말로 자존심인지 여기서 확인해 보아야겠다.
네가 생각하는 자존심이란 "네가 갖고있는 약한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 너의 약점을 상대가 알아차릴까봐 숨기려는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아니던가". 너는 바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자존심이라고 잘못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자존심(?) 역시 나의 겉과 속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당당하게 나타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너와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사용해왔던 단어 소위 자존심(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은 생길 수 없다.
물론 위에서 보기로 든 한 예는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그 문제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부딪쳐 마찰이 생기고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고 논쟁하고 싸우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쌍방에서 서로에게 각기 다른 기대감을 당연하고 막연하게 가정함으로써 생기는 마찰소리이다.
이런 막연하고 잘못된 기대와 가정(wrong assumption)은 서로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나는 상대를 위해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역시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받지 못하였으므로 엇갈리는 소리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잘못된 기대감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고 내 경계선(boundary)을 정확히 그어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야만 하고 또한 최대한 많이 이해하여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지 나를 있는 그대로 밖으로 내 비췰수 있고 바로 그것이 자신감이고 자신에게 정직하고 충실한 일이므로.
나의 마음좋은 친구야!
이제 다시 네게 묻겠다.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말하는 "행복한 삶"은 맨 앞에서 언급했듯 내 마음이 안정돼 있고, 기쁘고, 즉 편안한 삶을 말한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 편안해지더냐.
혼자있을 때?
아님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혹은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죽도록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는 상대란 내가 그 상대앞에 나를 잘 보이기위해 조금이라도 가식하지 않고 나 있는 그대로 온전히 내비췰수 있어도 괜찮은 관계일 때 편안해지지 않던가.
내가 나를 잘 알고있는 부분과 남도 나를 잘 알고있는 부분이 일치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도 내 앞에 없을때는 내가 아무에게도 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할 필요가 따로 없으니 바로 혼자있을 때 편안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스스로의 나의 단점과 장점 모두를 알고있는 사람은 가족일테니 가족에게 특별히 나를 포장해서 보여주지 않아도 되므로 편안하겠다. 내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다면 역시 그 친구와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겠다.
남녀가 사랑에 빠져 열렬히 로맨틱한 사랑을 하고있다면 좀 더 서로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해질테니 그다지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을 테고 흥분된 감정의 고조라고 해야 맞겠다. (사랑의 종류는 여러 가지로 나뉘고 로맨틱한 사랑의 형태는 이렇게 나타나며 그 외에도 성질이 다른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지 않겠다)
이렇게 내가 편안해 질 수 있는 건,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밖으로 내 비췰수 있는 힘이 열쇠이다.
그 영역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외에도 어떠한 낯선사람도 또한 공적인 석상에서도 표출시킬 수 있어진다면 그 사람은 무척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고 도가 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야!
감자나무의 밑동을 잡아냈으니 뽑아내기만 하면 간단할 줄 알았건만 그 밑동을 잡고 뿌리를 뽑았더니 그 속 뿌리마다 대롱대롱 감자가 열려있듯 내가 나 알아가기는 마치 수도없이 여러 곁가지를 내며 문제가 대롱거린다.
내가 발견한 신세계는 내 삶에 큰 가치를 부여하였고 이제 그 신세계를 탐험하듯 한가지씩 한가지씩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 걸, 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내는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그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내 가는 경로는 마치 내가 매일매일 밥을 먹고 생활을 하고 잠을 자고 또 일어나듯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끊임없이 이루어질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느낀 삶의 한 부분을 너도 조금은 이해하였고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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