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Paddy)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중년의 노총각이다. 그는 이 사람 저 사람 사적인 험담 거리를 들어내와서는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는가 하면 그로 인해 곧잘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래서 파디는 동네 아무개의 비밀이 세어나가는 경우에도 꼭 사람들로부터 의심받곤 했다.
파디가 의심받는 경우를 예를 들려면 몇 년 전 일을 말해야겠다.
우리 동네 발리마코우 바닷가에 남편이 없이 아이가 셋 딸린 여자가 아이들을 양육하며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여자는 겉으로는 무척 볼품 없는 외모이나 재주가 좋은 탓인지 나쁜 탓인지 세 아이 모두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그 세 아버지 중 아무하고도 결혼한 적이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아이리쉬 정부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혹은 결혼했어도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 양육비를 지원해준다. 물론 이 양육비는 자녀가 있는 가정에게는 일반적으로 모두 지불되지만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특별한 금액의 지원금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가 남자친구가 생겨 함께 동거하게 된다면 정부에서는 혼자 사는 여자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아 정부 지원금을 즉각 멈추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아이 셋의 여자가 남자친구가 새롭게 생겨 그 여자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물론 여자는 정부로부터 여전히 지원금을 받고 있었으므로 남자친구와 함께 사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임수도 잠시였고 정부의 사회복지관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 여자가 남자와 함께 살고있으므로 다시 말해 남자로부터 생계의 도움을 받고있는 사람으로 간주해 지원금이 끊기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를 사회복지관에 밀고한 사람은 모두들 파디라고 수군거렸었다.
밀고자가 파디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아무도 모르나 파디는 늘 이런 식의 의심을 사곤 했다.
파디는 늘 친절하였고 또한 재치 있는 말로 나를 잘 웃기는 사람이기도 하여 사실 나는 동네 사람들과는 달리 파디를 좋아한다.
이젠 10여년도 넘은 옛날, 파디를 처음 대한 장소는 동네 시골 펍 "화이트"였었다. 파디는 까만 색의 기네스 파인트 잔을 들고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덥석 손을 내밀며 내게 다가왔었다.
그렇게 파디는 쉽게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파디와는 처음부터, 영어를 못한다는 절박함없이, 부담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곧잘 파디하고만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파디를 그렇게 처음 만났던 기억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가물거리다, 어쩌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파디의 어머니를 우리는 미세스 오 그레이디 (Mrs. O'Grady) 라고 부른다. 오 그레이디라는 성씨처럼 아이리쉬 토박이 성에는 O 자가 흔히 들어가는걸 볼 수 있다. O는 "누구의 아들" 이라는 "아이리쉬 갤릭 순수 언어" 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있는 가수 쉬네이드 오코너(O'Conor) 역시 아이리쉬 이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여섯 명의 자식들이 고만고만한 나이일 때 남편을 잃었다고 한다.
남편은 어부였고 술꾼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남편은 조그만 고깃배로 오 그레이디 가족의 생계인 고기잡이를 나갔고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홀로 탄 작은 고기잡이배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는 사라졌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그가 사라져버렸는지는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가 간질병환자였던 것으로 짐작컨대 발작이 일어나고 발작 중 배에서 떨어져 바다 속에서 익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며칠 후 가재 망에 엉켜있는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한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졸망졸망한 여섯 자식들을 키우느라 험한 삶을 살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워터포드 종합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을 시작하였고 그 길고 긴 겨울을 외딴 시골에서 오토바이 혼다 50cc를 타고 왕복 40Km 추운 비바람을 맞으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한 한가지 정열로 매일 매일을 달렸을 것이다.
병원을 향할 때도 그리고 일을 마치고 집을 향할 때에도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참았을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병원이 나오고, 조금만 참으면 집이 나오고, 조금만 참으면 아이들이 자라고, 조금만 참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오토바이로 질주할 때마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미세스 오 그레이디와 그녀의 아들 파디는 옛날 7식구가 살던 그 작은 집에서 이제 둘만 남아 함께 살고 있다.
노총각 파디는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임이 틀림없다.
미세스 오 그레이디의 둘째 아들이며 파디의 동생인 죤은 데이빗의 둘도 없는 소꿉친구이다. 파디와는 반대로 죤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죤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죤을 좋아한다. 죤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솔선수범하고 부지런하며, 재치 있고 명랑하며, 성실하고 정의로우며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죤이 6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죤과 데이빗은 가난한 친구들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의 데이빗은 곧장 죤 집에 자주 놀러갔었다고 하는데 가난한 가운데에도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적은 음식으로 나누어먹는 친절을 늘 베풀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데이빗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도 하며 또한 그녀는 데이빗을 볼 때마다 새 아들이라고도 한다.
며칠 전 미세스 오 그레이디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파디가 50세 생일을 맞이하는데 자식을 위해 깜짝 파티를 열어줄 생각이니 와 달라는 초대의 전화였다.
그녀가 전화하는걸 파디가 보면 깜짝 파티가 탄로 날까봐 몰래하는 전화였다.
파티는 "화이트" 펍에서 열렸다.
9시에 시작한다는 파티에 흔쾌히 가겠노라고 대답하였고 드디어 그 날이 다가왔다.
76세의 어머니와 50세의 파디는 안타깝게도 둘 다 같은 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파디는 1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화이트 펍에서 늘 술을 마셨고 그 날도 역시 기네스를 마시기 위해 펍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파디가 입장하고 사람들은 박수로 환영했으며 생일 케익에 불이 밝혀졌다.
흰머리의 파디는 감격했고 돌아서 눈물까지 흘렸었다.
이 파티를 모의한 미세스 오 그레이디도 예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으므로 정말 예쁜 옷을 입었노라고 나는 인사말을 건넸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그녀답게 간단히 되받아 친다.
"예쁘면 뭘해. 남자가 따라야지"
노란 초가 지붕을 얹은 작은 시골펍은 사람들로 술렁거렸다.
펍 중앙으로는 아코디언과 피들(fiddle. 바이올린의 일종)로 이루어진 네 명의 음악 밴드가 오래된 아이리쉬 전통민요를 끊임없이 연주하며 부르고 있었다.
이들 음악 밴드들은 모두 70이 훨씬 넘은 백발의 노인들이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른 이 시골 동네펍은 제법 내 눈에 익은 사람들이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제 청년이 되어 기네스 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청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중년이 되어있었다.
그들에게서 세월이 느껴진다.
파디에게 다가가 생일을 축하하느라 가볍게 포옹하고 볼에 키스하자 파디는 무척 좋아한다.
파디는 연신 신이 나서 술잔을 기울이지만 동생인 죤은 파디가 심장마비를 두 번이나 치른 상태라 걱정되어 옆에서 떠나질 못한다.
파디 앞에는 죤의 걱정과는 달리 술잔이 여럿 줄을 지어 서있고 펍 안쪽으로는 샌드위치를 비롯한 파티 음식들이 넉넉히 쌓여있었다.
펍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사람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노래를 시킨다.
어른들은 떠나버린 옛사랑을 노래부르고, 소년들은 보이죤의 사랑의 고백을 노래부른다.
흥건해진 펍 저쪽 구석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사람을 보았다.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갈색의 짧은 머리에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주름투성이의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살이 찐 아줌마가 곱슬곱슬하고 헝클어진 머리로 앉아있었다.
내 옆에 앉은 죤의 아내 '안'은 내게 말해주었다. 저 한 쌍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우리 집 가까이, 바다를 앞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 몇 가구가 있는 곳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아름답게 보이는 집이 있다. 그 집에 두 레즈비언이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그 레즈비언들이었다.
남자같이 생긴 여자와 뚱뚱하게 살이 찐 여자. 남자같이 생긴 여자는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따라와 내게 말을 붙이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데이빗은 그 이후로 나를 놀리곤 한다.
그 옆으로는 폐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다니엘도 서 있다.
독일에서 건너와 아일랜드에 휴가 중인 두 십대 소녀를 둘러싸고 시골 청년들은 말을 붙여보려 안간힘을 다 쓰는 모습도 귀엽다.
9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 소녀들은 연신 담배와 술을 번갈아 가며 피우고 마셔댔다.
파디의 형제들은 다 모였다. 그들은 파디를 제외하고 모두 결혼하여 자식들이 세 네 명씩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파디의 첫 번째 여동생 알리스에게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나는 그 12살이라는 딸아이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소녀는 순정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생긴 얼굴과 몸을 하고있었다. 긴 머리와 계란형의 얼굴, 조각한 듯한 눈매와 코....
무엇보다도 그 소녀는 너무나 아름답고 겸손한 웃음을 짓고있었다.
어머니 알리스는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였고 남편 역시 벙어리였으며 세 아이 모두 벙어리이다.
알리스의 남편은 7년 전 폐암으로 죽었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남편 밑에서 보호받던 알리스는 모든 걸 새로 시작했다고 내게 말했다.
이제 운전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며 L 자는 진작에 떼었다고 내게 눈웃음친다.
파티도 끝나가고 마감시간이 되자 음악밴드들은 아이리쉬 애국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한다.
사람들은 애국가가 연주될 동안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 시골 펍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사람들은 비척비척 펍문을 나섰다.
예쁜 정장을 차려입은 미세스 오 그레이디는 오늘밤만큼은 오토바이를 타지 않을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가끔씩 동네 시골길에 부웅~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 때면 영락없는 미세스 오 그레이디가 헬멧을 쓰고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의 나이 76세.
어지간히 취한 파디도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보이며 "어 어" 거린다.
아참!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파디도 알리스처럼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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