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26  등록일 : 2001-06-20 오후 5:13:36

그건 내가 아니었어
글 : 허신영 ()

어엿한 학부형이 된 내가 이젠 학교 운동회에 참석하는 일은 뭐 대수도 아니라는 제법 연륜 있는 학부형 행세를 하면서 쫄래쫄래 죠슈아를 앞장세우고 학교를 향했다.

우리 한국의 직사각형 모양의 학교 건물에 비하면 그저 대 저택쯤으로 보이는 던모어(Dunmore)의 이 작은 초등학교는 교문을 통과해 학교 건물까지 2-3분 거리를 걸어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중앙에 질러놓은 그 길 양옆으로는 넓은 잔디밭과 커다란 활엽수들이 굵직하게 수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학교 뒷마당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은 한국 아줌마로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나를 처음 봤던 아이들마저 "주미엄마"를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주미 찾기에 분주해졌다.
남색 유니폼을 일제히 갖춰 입은 고만고만한 아이들 속에서 주미를 찾기는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다.
곧이어 서너명의 고학년 아이들이 주미를 앞세워 밀다시피하며 내 앞에 대령시키고는 미소를 자아내며 사라져갔다. 조금은 겸연쩍은 듯 내 앞에 세워진 주미는 "헬로우 엄마" 라고 하더니 다시 남색 유니폼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버린다.

녹색기(Green Flag)를 얻어내었다는 자축행사의 날이자 스포츠 데이라는 오늘, 학교 뒷마당에는 앙증맞은 작은 걸상들이 촘촘히 놓여 누군가 앉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선뜻 의자를 골라 앉기를 어색해하며 서성거리는 내 옆에, 굵직한 목소리가 친절하게 말을 붙여왔다.
"신영, 와줘서 고마워요. 이 던모어 Light of Christ(주님의 빛) 학교가 다시 한번 녹색기를 획득해서 오늘은 그 기념식이 있는 날이에요"

닐이었다. 이사벨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닐은 학교행사 때마다 적극적으로 돕는 일을 하곤 했었다.

"녹색기라....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해변가라고 판명된 바닷가에 품질보증처럼 내어주는 별 12개 달린 국기라고 아는데 아마 그런 건가보죠?"

"네, 뭐 그런 비슷한 거예요. 바닷가는 파란색 국기이고 학교는 녹색 국기죠. 학교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고, 분리수거가 잘 실행되고 있고, 점심시간에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퇴비를 만드는 등의 여러 가지 깨끗하고 모범이 되는 환경의 학교라고 인정받아 받는 국기이지요"

닐은 친절하게 웃음을 곁들여 설명해 주며 자리에 앉을 것을 내게 권하곤 사라졌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걸상에 겨우 엉덩이 반쪽을 걸치고 어설프게 앉아있기보다는 다리 쭉 뻗고 잔디밭에 편안히 앉기로 하고 그리로 발을 옮겼다.

곧이어 이사벨이 좌중 앞에 나왔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인사말을 하느라 목청을 돋구려 애쓰는 모습이 조금은 우습고도 안타깝게 보였다.
'조그만 확성기라도 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나자 나는 내가 다녔던 고향의 국민학교 생각에 절로 미소가 터져 나온다.

우리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들은 아침 조회 시간은 권위를 가장 잘 내세울 수 있는 기회이고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매일 아침 세워지는 아침 조회시간의 열띤 교장 선생님의 연설 아닌 연설, 겨울이면 발이 시려워 "마지막으로" 라는 말이 나오기만 간절히 기다렸고 여름이면 땀을 지르르 자아내며 여전히 "마지막으로"를 기다렸었다.
어디 그뿐인가. 마이크의 음량을 최대한 키운 웡웡거리는 교장선생님 훈화는 온 동네 주민들을 위한 연설이기도 했다.
내 새끼 착한 사람 만들려는 교장선생님의 훈화에 어느 주민 하나 그 소음을 소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참아낸걸 보면 우리 국민들도 어지간한 참을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많은 아침조회시간의 훈화를 듣느라 지루하고 춥고 더웠던 기억은 생생하여도 감동어린 훈화 한마디는 생각나지 않으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뒤이어 워터포드 환경청의 대표가 은빛 동전 같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축하 메세지를 전했다. 백발의 노인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확성기 없이 전달하기 위해 목청을 돋구었고 인사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선 사람을 따르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주동자를 따르는 군중처럼 나도 사람들 속에 섞여 따르기 시작했다.
교문 쪽으로 걸어 나서는 무리 속에서 나는 주미 선생님 메리와 인사를 나눈다.
안경알이 유난히 커다란 구식 안경을 낀 메리 선생님.

".....신영,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메리 선생님은 신영이라는 말을 기억해 내기 위해 잠깐 멈칫한 후 말을 이어냈다. (내 이름을 발음하고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이곳 아이리쉬들에게 친숙한 쉬운 이름으로 바꿀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신영이 아닐 것이기에 아직까지도 신영을 고집한다)

학부모는 어쨌든지 간에 선생님 앞에서는 약간의 기죽은 죄인처럼 황송하게 대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고정관념이 생긴 건 내 탓인가 조상 탓인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은 황송해진 나는 메리를 향하여 몇 마디를 꺼내본다.

"메리! 이렇게 좋은 행사를 하기 위해 준비를 많이 하셨을텐데 학교에 성금이라도 내야하는 것 아닌가요? 혹시 다들 냈는데 나만 몰라서 못 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학교' 특히 '국민학교' 하면 돈을 바쳐야한다는 관념이 박힌 아주 한국인 학부형다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운동회 날 행사비 성금은 지원 받았고, 자원봉사 어머니들도 여럿이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작 자원봉사에 참석도 하지 않은 터라 하다 못해 모금함이 있다면 1-2파운드 동전이라도 넣을 요량으로 내 뱉는 말이었다.

나도 그리 멀지 않은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녀본 기억이 있었고, 나를 가르쳤던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안타까워온다. 나는 늘 수줍은 아이였고 시골에서 갓 상경한 아이였고 가난한 축에 더 가까운 가정환경의 아이였으므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했었다.
그 담임 선생님은 부잣집 아이들을 무척 편애했었고 가난하고 엄마의 치맛바람을 타지 못하는 아이는 안중에도 없었던 교육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기꾼이었다. '짜게 먹은 놈이 물 쓴다' 는 옛 속담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이니 그 선생을 꼭 탓할 것만도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일부 선생님들과 학생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점이나 무례함은 (책가방을 뒤지고, 출석부로 머리통을 때리거나, 팔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질을 한다거나, 욕 짓거리를 함부로 하는 행동) 바로 학생들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데서 기인된다고 본다.
아이들 뒤에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거나 더 중요하게는 그 코흘리개 철부지들이 앞으로 성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 그 선생에 대한 어떤 인상을 가지리라는 생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체벌에 있어 책임과 사랑이 없고 권위만 있다면 그건 단순한 폭력일 뿐이다.

"아니예요, 신영. 당신은 언제나 후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있어요. 워터포드 환경청에서 지원을 해주어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함께 다과시간 갖으며 즐겁게 놀다 가세요"

아이들이 좋아서 퇴직하지 못하고 일년만 더 일년만 더 하고 계신다는 메리 선생님을, 고마운 이유에서 사실 난 황송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코흘리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정성 들여 꼼꼼히 챙기고 보살피는 모습은 정말이지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선생님이시다.
메리는 학부모를 만날 때마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태도로 스스럼없이 말을 붙여온다. 저기서부터 달려와 말을 붙이는 선생님이시다.

교문에 도착하고 닐은 교문 기둥에 올라서서 녹색기를 매달았다. 사람들은 박수로 환영하였고 다시 교정으로 돌아와 잔치를 계속하였다.

이제 운동회가 시작되는 것인가!

운동회라면 청군 백군 나눠 달리기도 하고, 줄다리기도 하고, 주머니 터트리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뻑적지근한 점심시간도 갖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스포츠 데이' 라는 오늘, 어디 당장 경주를 할 태세는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은 자신의 얼굴에 동물모양(face painting)의 그림 그리기에 바빠하거나 바운시 카슬(bouncy castle: 공기백 위에서 통통 튀며 노는 기구)에서 용수철처럼 뛰어놀며 학교에서 마련한 아이스크림, 과자, 음료수 등을 먹고 놀기에 바쁘다. 어른들 역시 어른들 나름대로 다과상 앞에서 홍차와 함께 자유스럽게 이런저런 수다잔치가 한창이다.
벌여놓은 잔치에 아무 도움도 못된 체 염치 불구 한 마음으로 참여하였지만 숫기 없다는 나는 다과실에서 만큼은 부끄러움 없이 이것저것 맛보기에 성의껏 참여하였다.

문밖에서부터 시끌벅적한 팝 뮤직이 쿵쾅거리며 흘러나오고 그 음악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기니 주미네 교실에서 디스코가 한창이다.

'달음박질 대신에 디스코라.....아니 웬걸...정말 디스코 음악의 DJ까지 출동하였구나.' 여기저기 번쩍번쩍 디스코 불빛도 장치되었고 마침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밴드 그룹이자 주미의 우상 'S club 7'의 노래에 맞춰 유치부 학생들은 깡충깡충 뛰며 좋아라했다. 아이스크림과 과자와 음료수로 배를 가득 채운 아이들은 이제 뛰는 일만 남았다는 듯 말이다.
고학년 언니들은 연신 과자를 들고 다니며 어린 아이들에게 권해주었고 몇 번이고 내 앞을 지나칠 때마다 내게 권하는 모습도 정겹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습단 말이다. 디스코 파티....그 파티음악에 나오는 팝 음악들이 정말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에 말이다.
Shaggy라는 가수의 It wasn't me 라는 노래는 아무래도 저 꼬마 애들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음악인데 하는 생각은 내가 너무 앞뒤 꽝 막힌데다 필요이상으로 깊게 생각하는 탓일까!
애인이 옆집 남자와 바람이 나서 욕실에서, 부엌에서 sex 광경을 목격했다는 친구의 심문에 It wasn't me (그건 내가 아니었어)라고 후렴하는 노래는 아무래도 어린것들에게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마들은 바람피우다 걸린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라는 It wasn't me를 연신 따라 부르며 좋아라 한다.
어디 애들 탓만 하랴. 라디오에서 이 노래만 나오면 주미, 죠슈아, 데이빗과 나는 넷이서 목청을 돋구어 It wasn't me를 합창하고 그건 우리집 유행어로 통하지 않던가.

이 학교에 'Buddy System' 이라는 게 있다.
고학년의 학생이 유치부 학생을 돌보는 시스템으로서 유치부 학생에게는 누구나 자신을 돌봐주는 버디가 한 명씩 정해져 있는 것이다.
버디들은 작은 엄마들처럼 자신이 돌봐야할 어린 학생들을 안아주고 놀아주고 챙겨주고 도와주고 귀여워 해주는 모습이 한없이 아름답다.
그런 모습들은 잠시나마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금방 볼 수 있었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너그럽게 한다.

주미에게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조르며 도시락이랑 벗어둔 옷이랑 챙겨오라는 내 말에 난데없이 서너명의 고학년들이 달라붙어 여러 벌의 똑같은 옷 중에서 주미 옷을 찾느라 열심인 모습이 보인다. 도시락과 옷을 챙겨 주미에게 입혀주고 버디언니들은 크게 주미를 안아준다. 비단 주미뿐만이 아니라 고학년들은 어린 유치부 아이들을 한없이 예뻐 해주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나의 재촉에, 좀 더 놀고싶었던 주미는 쀼루퉁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하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커피숍에 갈 것을 약속하자 금방 신이나 있다.
The melting pot라는 던모어의 작고 허름한 커피숍은 비탈을 경계선으로 한 짙푸른 바다와 그 위의 세일링 보트들의 정박을 곧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어서 내가 자주 드나드는 공간이다.

오는 길에 바다를 좋아하는 주미와 죠슈아를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썰린 바닷가에 풀어놓고, 수평선 위에 솟은 먼발치의 아이들을 지켜보다, 바다와 하늘도 지켜보다 잠시 둑에 누워 눈을 감아본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 소리, 까르륵대는 아이들 웃음소리, 째르륵대는 새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고 나는 아이들을 향해 외친다.

"누가 나를 이곳에 데려다놨니?"
아이들은 내게 대답한다.

"It wasn't me"

글쎄... 너희들도 Shaggy처럼 내게 뻔한 거짓말을 하고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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