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19  등록일 : 2000-12-05 오후 4:21:09

"우아하고 싶은 여자의 부엌"
글 : 허신영 ()

유럽 아니라 별천지를 간다해도 한국 여자가 사는 집 부엌은 어디를 가나 복사품처럼 똑같은 내용물들을 비축하고 있다.

그 여자가 이곳 더블린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 한지 25년, 이제 생김새를 빼고는 아이리쉬적인 사고방식과 태도, 철학, 혹은 입맛까지도 변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 같은 그 여자는, 내가 아는 한국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한국 여자였다.
그 여자의 인생관과 철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입맛만큼은 절대적으로 토종 한국인이었고 그건 그 여자의 부엌과 식성이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여자의 부엌이라면 마늘냄새와 함께 텁터름하고 쩝쩌름한 냄새가 늘 어우러져 있게 마련, 그 여자의 부엌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키가 제일 커서 찬장 속 맨 뒷구석에 자리잡고 서있는 1리터짜리 샘표간장, 몽고간장병 하나씩, 그 앞으로 고춧가루통, 깨소금통, 다시다통, 미원통, 참기름 병 그리고 냉장고 속의 터주대감처럼 들어앉아 있는 된장한통, 고추장한통, 갈은 마늘한통, 배추김치한통 거기다 한국을 방문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오징어 젓갈, 창란 젓갈, 잘하면 양념깻잎한통 까지도 당당하게 냄새 풍기면 들어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신주단지처럼 따로 성스럽게 모셔두는 국수, 냉면, 잡채, 라면, 미역, 김, 멸치는 또 어떤가.

그 여자가 한국을 다녀왔을 때면 습관처럼 하는 한마디가 있었다.
"나 남부러울 것 없이 갖출 것 다 갖춘 여자요. 깻잎 장아찌랑 오징어 젓갈도 있으니 한번 먹으러 오시오" 였다.

행여 이곳 사람들이 우리 한국 여자들의 신주단지를 볼 때면 무슨 전쟁 식량 준비라도 하는 줄 이상히 여길 것이나 이렇듯 목록을 갖춰놓기도 쉬운일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할때면 냉장고의 터주대감과 비워진 신주단지를 생각해, 매번 동행하는 이민 가방은 냄새나고 무거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돌아온다. 냄새만 나던지, 무겁기만 하던지, 어찌 우리 음식은 무겁고 냄새나는 둘 다의 조건을 갖추었는지, 그러다 보니 우리네 여자들의 한국 방문은 경쾌하고 세련된 여행이 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렇듯 고생해서 비축해둔 냉장고의 터주대감과 신주단지는 그래도 먹는 즐거움이 있어 구질구질했던 이민가방과 함께 한 여행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냄새나면서 맛있는 그 음식들을 먹는 과정만큼은 그 여자를 우아하게 만들지 못했다.
아니 우아하기는커녕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로까지 번졌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여자의 부엌은 현관처럼 사용되고 있었기에 온갖 잡상인을 포함한 들락거리는 손님들을, 김치 끼워진 젓가락 들고 마주쳐야 하는 괴로움을 그 여자는 겪고 있었다.
그 여자의 부엌 커다란 유리창문은 부엌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문을 두드리려면 꼭 그 커다란 유리창을 지나게 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방문객의 눈에는 부엌의 전경이 들어오기도 전에 훤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커다란 스테인레스 대접에 삶은 국수를 소복이 담아, 냄새나는 멸치로 우려낸 다시국물을 부어, 혓바닥 내밀고 입속에 한젓가락 떠 넣는 순간에 찾아오느냔 말이다.
하필이면 눈 부릅뜨고 벌어질대로 벌어진 입에 삼겹살 넣은 상추쌈을 꾸겨 넣을 때 오느냔 말이다.
하필이면 찬밥에 김치넣고 참기름 떨어뜨려 비며 먹는 그때, 입 주위는 벌겋고 이빨에는 고춧가루가 잔뜩 끼어있을 때 찾아오느냔 말이다.
하필이면 라면 끓여 냄비 통째로 먹고 있을 때 오느냔 말이다.

그 여자는 민망하고 창피하다못해 자존심 상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부엌 식탁을 놔두고 이층방으로 올라가 숨어서 먹고 내려온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 이곳 음식만 같았어도, 스푼과 포크로 얌전히 감아 먹는 스파게티만 같았어도 그 여자는 덜 창피했을 것이다.
방문객들이, 집집마다 김치와 된장국을 두고 먹는 한국인들만 같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만 명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던가!
그렇다면 그 여자는 똑똑한 여자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는 우아하고 싶었다.

우아하게 커피잔을 받침잔에서 올려들고 타임지를 읽고 있을 때 들어오기만 했어도 그 여자는 집까지 개조할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여자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냥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서는 정말 안될 일이었다.
해결책이야 우리 음식을 안 먹으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지만 어디 그럴수야 있는가.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 떠나 사는 것만 해도 서러운 일인데, 그나마 고향 음식마저 끊고 산다니.
그건, 살기 위해서도 먹고, 먹기 위해서도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두 번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현관문으로 착각하게 나있는 부엌문이 문제였다. 현관문이 제 역할만 해 준다면 이런 자존심 상하는 문제는 충분히 절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현관문 앞에 이정표라도 그려 현관문임을 방문객들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풀릴 문제일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드디어 고심 끝에 집을 개조하기로 했다. 누구든지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어떤 것이 현관문이고 부엌문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집을 개조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들도 점점 커가고 집을 넓혀야 할 필요성도 느꼈던 차, 떡본 김에 제사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정말로 그 여자는 그렇게 제사를 지냈고 근 1년여 동안의 제사(개조 공사) 때문에 흰머리가 더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김치하나 집어먹어도 떳떳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완성될 날을 기다리며 공사를 끝냈다.

이제 집은 넓어졌고 현관문의 위치도 바뀌었다. 하지만 현관문의 위치만 바뀌면 문제가 바뀔 줄 알았던 그 문제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그 여자는 알게 되었다.
그 여자의 집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예전부터 부엌으로 드나드는 습관이 생겨 굳이 개조한 현관문을 제쳐두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끝까지 부엌문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그 여자는 냉장고 속의 신 김치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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