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분명 상경이지 외출이라고 말하기가 힘들겠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떤 것부터가 일반 외출하고는 경우가 다르다.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는 남편의 말을 되새겨 보니 두 번 생각할 것 없는 분명한 상경이다.
"더블린은 워터포드와 또 다르니 항상 조심해야 해, 핸드백 조심히 가지고 다니고 특히 요즘같이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기에는 소매치기들도 많으니까, 핸드백을 읽어버릴 경우를 생각해서 호주머니속에 따로 돈을 좀 넣어두도록 하고, 차조심하고 길조심하고 무슨일 있으면 당장 집으로 연락하고, 더블린은 이제 옛날의 더블린이 아니야. 많이 위험해졌어, 워터포드하고는 다르니까....."
워터포드 기차역에 도착하고 표를 사기위해 줄을 서서, 하릴없이 기차역 출구를 올려다보니 Plunket Station이라고 써 있다.
"한집에 살면서 시어머니 성도 모른다더니 내가 그짝이네, 여기서 산지가 몇 년인데 워터포드 기차역 이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니.......왕복요, 내일 올 거예요. 17파운드? 시간표좀 주세요"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제외한 두 여자들도 나와 비슷한 절차?를 밟고 왔구나.
"이 기차가 더블린까지 가는게 확실합니까?"
"당신은 아까부터 확실하다는데 왜 또 물어보고 그래요"
기차가 떠나는 걸 봐야 자신도 떠날 수 있겠다면 끝까지 기차가 와서 부인을 실어갈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남편
"당신 안하던 짓을 왜해요! 기차오면 어련히 알아서 탈까, 어서 들어가세요"
영화 한편 보러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상경한 여자들, 특히 그 중에서도 시골에 묻혀 사는 나는 인파로 이루어진 거리를 헤쳐 걸어나가기가 무척 힘이 든다.
왜 이렇게 걸리적거리고 부딪치는지.....
"어디 다리 쭉 뻗고 퍼질러앉아서 노닥거릴 때가 없을까?"
"그러게 말야! 한국 같으면 갈비집에 가서 밥그릇 옆에 뼈다귀 쌓아가며 뜯어댈텐데"
"아줌마! 여기 갈비 일인분 더줘요. 소주한병 더줘요.... 갈비굽는 냄새에 희뿌연한 연기, 머리카락과 옷은 고기와 숯이 타는 냄새에 절여지고....
왁자지걸 떠드는 소리, 애 우는 소리, 스텐레스 쟁반 부딪치는 소리, 환풍기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
"그래, 이젠 그만들 해요, 이곳엔 그런곳 없으니까 우리 저기 보이는 핏자집에나 가자구요"
그래서 결국 상경한 여자들이 모인 곳은 핏자집이었다.
Large Pizza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앉은 여자들은 비록 몸은 집을 떠나있지만 마음은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못미더운 남편들을 향해 각자 한마디씩.
"세척기 돌리라고 했는데 돌렸는지 모르겠네."
"빨래 걷으라는 말을 안하고 왔어"
"우리집에 생쥐가 들었는데 자기전에 쓰레기 버리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인구 적은 아일랜드라지만 백만명이라는 인구가 살고있는 더블린은 어지간히 북적거린다.
"저기 보이는 게 Sex Shop 이예요"
"정통 카톨릭 국가에 Sex Shop이라~ 이제 아일랜드도 옛날의 아일랜드가 아니네요"
"저 안에는 별 희한한 물건이 다 있다구요"
"그렇다면 댁은 들어가 봤단 말이에요?"
"그런데 별 희한한 물건이란 어떤거죠? 한번 들어가 볼까요?"
"까르륵"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더블린의 템플바(Temple Bar)를 뒷전으로 우리는 쇼핑센터부터 들렀다.
Marks & Spencer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쇼핑 백화점.
중저가의 가격과 품질 좋고 세련된 상품들이 맘에 들어, 내가 사 입을만한 옷을 얼핏 살피다보니 어느새 아동복 층에 올라서 버렸구나.
"빨간색의 예쁜 드레스는 크리스마스날 주미가 입으면 좋을거야. 그리고 저 잠옷은 이불을 차내고 자는 죠슈아가 입으면 밤새 따뜻하겠어."
그러다 보니 정작 나를 위해 산 물건은 겨우 속옷 한 개!
자! 이제 2시가 됐으니 서서히 필름 센터로 옮겨볼까요?
"어제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이해하기가 꽤 난해하다고 들었어요"
"멜로드라마가 난해하고 자시고 할 거 뭐 있을까요?"
"본 사람마다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영화라고 하더군요"
"난 누구 옆에 끼고 물어보면서 영화를 봐야 이해가 가는 사람인데 걱정이네요"
"어떤 영화기에 그러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어머! 나는 초대장을 놓고 왔어요"
"무슨 초대장이 따로 필요해요? 한국사람 얼굴이 초대장 역할을 할 텐데요"
정말 그랬다. 대사관 측에서 나온 한국인 신사는 우리 얼굴을 보고 정중히 인사했고 그것으로서 통관을 치른 셈이다. 작은 극장안은 한국인보다는 이곳 아이리쉬들이 더 많은 듯도 하다.
내가 알기론 더블린에는 그래도 꽤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행사때 참석 잘 안해요. 왜 한국 사람들 모이면 말도 많고 부딪치고 그러잖아요"
"하긴 우리같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나 뭐 큰 귀경(구경)거리 놓치는 줄 알고 쫒아다니지..."
"The Power of Kangwon Province"
홍 상수 감독. 백 종학, 오 연홍
한국 원제목은 "강원도의 힘"인지 모르겠다.
줄거리보다는 Detail에 신경을 더 많이 쓴 것 같은 이 영화는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름대로 감독의 많은 노력이 보인다.
영화 평론가들의 평을 들을때면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정확하게 찝고 논하곤 해서 아~ 저 영화는 저렇게 받아들여야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던 나는, 있는 화면과 대사 밖에는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소위 지성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의 저질스런 위선, 진정한 사랑이라고 고백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이기적인 성욕의 본능일 뿐, 하튼 이런 것들의 밑바닥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현대 사회와 현대인들의 문제점을 잘 그려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궁금하기도 하다. 한국인들만이 아는 한국 사회의 구조와 성향을 모르는 이곳 아이리쉬들은 어떤 평을 할까! 관람객중에는 아이리쉬들도 꽤 있었으니까.
"저 영화 장면중 가장 감동스러웠던 장면이 뭔줄 아세요?"
"감동스런 장면... 글쎄요"
"인사동거리 나올 때 당장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어요. 인사동은 내가 살아온 터전이거든요"
"그리고 또 있어요"
"여자가 목욕탕에서 몸무게 달 때... 나도 그렇게 4자로 시작되는 몸무게여봤으면..."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각자 한마디씩 길을 메우며 더블린 거리를 네명의 한국 여자들은 걷는다.
좁은 인도길에 우리 뒤를 바쁘게 걸어오는 서양인 커플이 우리가 하는말이 우습게 들리는지 양양양양 흉내를 내며 우리 어깨를 지나친다.
둘다 키가 훤칠한 금발의 남녀는 아주 당당하고 기세좋게 걸어나간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난 가끔 저런 사람들한테 강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어요"
"뭐죠?"
"우선 체격에서부터 혹은 서양인이라는 그래서 우월해 보이려는 눈빛, 내가 너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는 내려다보는 그 눈 말이에요"
"맞아요. 다행히 그리 흔하지는 않는 경우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어요"
"특히 우리 앞을 막 지나간 금발의 키 큰 여자 말이에요"
"나도 느꼈어요. 그래서 나는 항상 말하죠. 길거리를 걸을때나 어디서나 당당하게 걸으라고, 꾸부정하게 기죽은 사람처럼 걷지 말라고, 항상 예의바르고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하라고....."
"맞아요. 맞아"
버스를 타기 위해 O'connell 스트릿을 지나고, 리피(leffey) 강을 건넌다.
많은 사람들을 실은 다리는 작게 출렁거리고 밑으로는 어두컴컴한 강물이 깊게 흘러 보기만해도 무섭고 추워진다.
일찍부터 어두워지는 겨울 오후, 더블린 도시는 밤을 밝히기 위해 하나둘 반짝거리기 시작, 밤의 더블린은 또 다른 도시로 둔갑하는구나. 그러고보니 한번도 더블린의 밤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다리가 흔들거리는 거죠?"
"성수대교보다 더 튼튼해 보이진 않은 것 같은데 무너질지도 몰라요 빨리 건넙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49번 버스를 기다려야 한단다.
작년 한국에서 버스를 타본 이후 이번이 처음, 버스비가 얼마인지 나는 알 턱이 없다.
더블린24 구역까지는 1파운드15펜스.
사람 수대로 버스비를 계산해놓고.... 드디어 버스에 올라탔다. 지폐를 내려는 우리에게 운전사는 지폐는 안 된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강한 더블린 토박이 악센트로 말하는지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더블린은 수도이면서 어쩜 표준말을 쓰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나는 아직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딱딱하고 교양미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억센 억양.
세계적인 팝그룹 Boy Zone만 해도 노래할 때는 봐줄 만 하지만 말하느라 입을 벌리기 시작하면 얼마나 강한 더블린 악센트가 흘러나오는지 매력이 사라지곤 하지 않던가.!.
친구의 안내로 그녀의 집에 도착해 모두가 보따리를 풀고 저녁상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영화가 아니라 이 저녁 테이블인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
비빔밥 재료를 모두 준비해 놓고 나온 그 친구는 열심히 밥을 짓고 볶고 끓여댄다.
한국 여자가 사는집, 일년 전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 친구 거실에는 한국인 신혼부부가 사는 집이라면 의례 그렇듯 커다란 결혼 액자 사진이 걸려있다.
조그만 몸집의 그 여자와 키가 큰 남편 제랄드. 하얗고 화려한 웨딩 드레스에 파묻혀 수줍게 웃고 있는 웃음옆에 서 있는 신랑의 쑥스러운 표정.
저 사진을 찍은 한국인 사진사는 온갖 손짓발짓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가 아는 영어 단어를 총동원해서 예스 와 노를 외쳤겠지.
"아침이면 설거지 끝내고 청소해놓고 출근을 한다니요 정말 좋은 신랑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 신랑이 어디 있어요. 정말 선이는 복도 많아요"
복은요....뭘"
"내 남편은 뭘 시키면 하긴 하는데 다시 내 손을 거쳐야만 하는데"
"그건 작전 일수 있어요. 다음에는 안시키겠지 하는..."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꼭 그런건 아니에요"
"비교하지 마세요. 사람마다 장단이 있으니까요."
"댁의 남편은 틀림없이 다른 어떤면이 좋을 거예요"
"하여간 이곳 아이리쉬 남자들 정말 가정적이에요. 퇴근하면 집밖에 모르고 가정을 최고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집 수리공 사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다 직접 칠하고 만들고 정원가꾸고 여가 시간은 가족들과 보내고 부인을 동반하지 않는 외출은 잘 안하고....우리 한국사람들도 요즘 많이 가정적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랬으면 좋겠어요"
"글쎄 그건 그렇고 시집올 때 시어머니 선물 비싼 것 안 사왔다고 불화생기는 그런 가정은 이제 없어져야 할텐데요."
"난 그런 말 들으면 너무 기가 막혀서 할말이 없어요"
나중에 합석한 친구의 남편은 재치가 많아 늘 재미있는 사람이다.
"제랄드! 그래 한국을 다녀왔으니 한번 말해보세요. 한국에 대한 인상이 어떻던가요?"
"왠 사람들이 그리 많습니까? 세계를 많이 돌아다녀봤지만 그렇게 북적대는 나라는 처음이에요"
"하하. 그 대답이 나올 줄 알았어요. 열이면 열사람 두 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이죠. 그 외는요?"
"다들 미친 운전자들만 있어요"
"하하. 그 대답도 예상했던 거예요"
"일년에 만명이 넘게 길거리에서 죽어나간다니 정말 엄청나더군요. 한국에 있는 동안 차속에 앉을때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한국에 머물 동안은 덕분에 절실한 신자가 되었겠군요.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 아멘. 당신의 신앙심을 기르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밤늦게까지 먹고 난 빈 음식그릇 와인병 맥주병 빈잔들. 그 다음날 일어나 부엌에 나가보니 흔적 없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물론 제랄드가 부인을 아끼느라 하는 소행!. 제랄드는 "우렁이 색시"
"선이는 무척 힘든 일을 하는 여자예요.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런 가사일은 손수 해야죠. 선이는 직장일도 하면서 아이도 봐야하는데 이까짓 집안 치우는 일을 돕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오래간만에 모인 우리들은 더블린 친구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크게 식사를 한 다음,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기차를 타고 하행해야 했다. 아점식사는 돼지고기와 상추쌈 그리고 쌈장, 부침개, 물론 김치도.
한국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제랄드는 쌈장을 넣어 커다랗게 상추쌈을 만들어 맛있게도 먹는다.
역까지 데려다 주러 운전석에 앉은 그의 친절한 얼굴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특히 그의 입 주위에 묻은 쌈장과 김치국물이 벌겋게 물들어, 불긋해진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 좋다.
기차가 도착했다.
한국의 새마을호에 비하면 낡은 기차지만 네 개의 의자가 마주보고 있고 중간에 꽤 큼직한 테이블이 놓여 있는게 보통. 공간이 넓고 항상 빈자리가 많아 언제든 편안히 여행할 수 있다는게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지금쯤 한국은 기차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또한 절경이겠지. 단풍산을 지나고 들을 지나면 또 단풍산이 나오겠지....
세시간동안의 기차 여행, 초원위의 양떼들과 소떼들을 보는 것 또한 단풍산 못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워터포드에 도착하니 마음이 놓이며 몹시 푸근해진다.
어디를 가도 내가 아는 곳이고 경계심을 놓을 수 있는 곳, 간혹 아는 사람을 만나 잠깐씩이나마 인사도 나누며 지나는 길.
데이빗과 아이들의 마중을 받으며.
"그래, 더블린 여행은 재미있었어?"
"당신 덕분에. 그래서 앞으로 한달에 한번씩 만나기로 했지. 다음달은 12월 미친 한달이 될테니 건너뛰고, 1월 쎄일이 시작되는 첫째주 토요일에 더블린 Graffton Street에서 만나기로 했어"
"이제 맛을 들여 바람이 났구만...."
집에 돌아오니 벽난로의 불이, 붉은 점점을 이루며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포근한 내 집. 그건 포근함을 느낄 기회가 없을정도로 집안에만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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