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10  등록일 : 2000-10-13 오후 2:48:47

제니퍼를 위한 기도 1
글 : 허신영 ()

내가 절딘(Geraldine)을 알고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때가 이사벨을 알게 된 때랑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눈에 띄게 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마치 지난 5년 동안 내 배가 정말 불러질 것인가를 의문스럽게 지켜보고 있었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동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내 배를 훔쳐보며 축하의 인사말을 전해주었다.

임신한 부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의례 지나가는 말이겠건만 나는 이 세상에서 임신한 여자가 나뿐인 것처럼 내심 당당해 지곤 했었다.

결혼한 지 처음 2.3년 간은 '이제 아이도 가져야죠?' 라고 인사말들을 곧잘 하더니만 4년쯤 되니 '저 부부 무슨 문제라도 있나보군' 싶었는지 그래서 실례가 될 것 같았는지 아예 물어보지 조차 않았었다.

그 날은 내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꽤나 큼직해진 배를 중심 없이 쑥 내밀고는 우리 집 정원 잔디밭을 데이빗과 함께 거닐고 있던 초가을 어느 오후였다.

근 해질 무렵이 되어 절딘은 두 딸들과 산책을 나왔다가 우리 집 앞을 지나는 길에 잠깐 발을 멈추고 나를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네었었다.

축하의 말은 누구를 막론하고 좋은날이 언제냐고 물음으로써 시작됐다.

첫 임산부들이 모두 그렇듯 나도 로켓트 발사 직전 신중하게 카운트다운을 하고있던 사람처럼 답은 금방 나오곤 했다.

"3주 남았어요." 라고 말은 했지만 동네 사람임이 틀림없을 어디서 본 듯도 한 인상인 절딘을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 내려 애썼다. 결국 애쓴 보람이 없자 내가 현재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었었다. 하긴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겨우 묻는 말에 짧은 답변을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모든 얘기는 데이빗이 이끌어 나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데이빗 역시 의례 할 법한, 이분은 누구고 저분은 누구라고 소개말이 오고가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를 더 어리둥절하게 했었다.

절딘이 가고 나서야 안 일이지만 데이빗도 절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못해 그랬다고 했다.

어쨌거나 절딘은 나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 대하듯 자연스럽고도 많은 말들을 함으로 인해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절딘은 이곳 전형적인 친절한 아이리쉬 부인들처럼 말을 그것도 아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과, 말이 아주 많다는 것에는 나 나름대로 구분을 두고 싶다.

전자는 정담을 많이 한다는 뜻이고 후자는 남의 험담이나 간섭하기를 좋아한다는 뜻 이라고 해 두자.

절딘은 말을 함에 있어 서두르는 법이 없이 차곡차곡 아주 자세히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구입한 새 옷에 대해서 말을 하기 위해 6하 아니 7하 8하 원칙에 따라 아주 하찮은 그때 당시 주위 환경까지 세밀하게 말하곤 하였는데, 왜 이 옷을 사야했는지를 우선 상세히 설명한 다음 몇 월 며칠 처음 이 옷을 가게에서 보고 사기로 마음먹고, 어떤 기분으로 누구와 함께 가서 그 누구라는 사람은 형편이 어떠했고, 어떤 관계이며 옷가게에 가는 도중 교통이 어떠했고, 그 가게의 위치와, 그 옆 건물에는 뭐가 있고, 그 건물 안에 자기가 알고있는 아무개가 근무를 하고 있으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한 다음, 그 옷가게는 어떤 진열상태였고, 주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얘기를 했고, 그때 어떤 다른 옷들이 있었고, 거기에 따른 일일한 설명이 있은 다음, 구입을 했고 그 때 기분이 어땠는지 그 가게를 나와서 어디를 가서 무엇을 더 사고 어떻게 집에 와서 무엇을 먹고 몇 시에 잔 것까지 말 할 정도였다.

그 날 우리 집 앞에 잠깐 섰을 때도 말이 잠깐이지 근 한시간은 족히 서 있었던 것 같다. 해가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마 1시간은 더 있었을 거라는 예측은 거의 맞았을 것이다.

절딘 옆에 조용히 서 있기만 한 귀여운 두 딸들은 참을성이 있는 아이들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엄마에게 잘 길들여진 것인지 아무 말 없이 엄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절딘은 자신의 임신 기간과 어떻게 임신을 준비했고 생각지도 못한 수술로 아이를 낳아야 했던 일과 자신의 작은 몸에 비해 아이가 너무 컸다는 얘기와 두 아이의 몸무게가 몇 이였고 수술 후 힘들었던 일 등을 세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난 그때만 해도 내가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만 잠자코 절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옆에 서 있는 두 딸들과 그녀들이 한 마리씩 목에 걸어진 끈을 잡고 있는 개들을 바라보았다.

첫째딸은 이름이 제니퍼였고 둘째딸은 린다였다.

제니퍼는 그때 12살이었고 린다는 10살이었다.

제니퍼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얼굴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분명 그 아이의 금발머리는 퍽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오동통 살이 붙은 체형에 유독 멀리서도 제니퍼라는 것을 누구든지 금방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금발머리였다.

과장된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도 제니퍼의 금발머리는 엉덩이까지 닿았다. 노란색에 가까운 그 금발은 숱도 많았고 그래서 더 탐스러웠다.

절딘의 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절딘은 자신의 작은 몸집에 비해 배속의 제니퍼가 굉장히 커서, 태어났을 때 몸무게가 9.4lbs(파운드)나 되었다는 말을 하며 그때를 기억하는 듯 따뜻한 눈으로 제니퍼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긴 금발의 제니퍼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짓기만 했다.

옆에 있던 린다가 "마미! 내 몸무게는?" 이라고 묻자 절딘은 검지를 입에 대고 짧게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듯 하더니 "너도 9파운드는 넘었어"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린다 때문에 끊긴 이야기를 따라잡아야겠다는 듯이 우리 둘을 향해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길이나 무게단위를 이곳 사람들이 하는 식의 파운드나 피트로 말할 때는 항상 내 머릿속으로 열심히 kg이나 미터로 환산하는 계산을 해야한다. 그것도 데이빗이 옆에 있을 땐 그나마 그 간단한 계산마저도 귀찮아져 대신 그에게 물어 보고는 했지만 어쨌든 9파운드는 4kg이 좀 넘는 무게였다.

나는 데이빗을 절딘에게 내맡긴 채 두 어린 소녀와 그녀들의 손에 잡혀있는 개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흰 바탕에 검정과 엷은 갈색 무늬의 윤기가 흐르는 긴 털의 두 마리 개들은 볼만 할 만큼 잘생겼었다.

아직은 여리고 수줍기만 해 보이는 두 자매는 서로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씩을 주고받고 가끔씩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두 소녀를 그녀들에게 어울릴만한 은은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특히 탐스러운 긴 금발머리를 한 제니퍼를 향해 한마디했다.

"머리가 정말 아름답구나"

"Thank you" 라고 짧고도 수줍게 대답하는 제니퍼는 천상 금발의 소녀다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길고도 숱 많은 머리를 감고 말려 관리하기 위해서는 꼭 밤마다 감아야 하고, 말리기까지는 근 한시간 정도나 걸린다는 제니퍼의 머리는 이미 동네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탐스러운 머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제니퍼를 볼 때마다 동화 속의 라푼젤(Rapunzel)이 생각나곤 했다(못된 마녀 때문에 높은 성 꼭대기에 갇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라푼젤. 지나가던 왕자님은 그 노랫소리에 반했고 라푼젤은 긴 금발의 머리를 내려뜨려 왕자님이 올라올 수 있도록 해서 둘은 이내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

린다는 제니퍼와는 머리 색깔부터가 아주 달랐는데 금발 대신 여우 털빛의 붉은 색의 목선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통통한 제니퍼에 비해 깡마르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잔뜩 나 있어 무척 귀여워 보였다.

붉은 머리와 흰 살결 위의 죽은 깨는 전형적인 아이리쉬 모습이기도 했다.

전혀 다른 모습의 두 자매는 외모와는 달리 무척 다정해 보였다.

나는 다정한 자매를 볼 때면 애틋한 감정이 물큼물큼 솟아나 마음이 푹 젖어드는 것만 같다.

나는 아무도 몰래 하나뿐인 언니를 어느새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은 늘 자유롭고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다는 편리함과 보완 때문에 나는 상상이나 추억 혹은 망상까지도 아무 때나 곧 잘 하곤 했다.

나에게는 절딘의 말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처럼 내 귓바퀴를 스쳐 마냥 사라져갈 뿐이었다.

그 이후로 절딘과 제니퍼, 린다는 안면뿐 아니라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주미가 태어나고 해가 지날수록 제니퍼와 린다는 물을 흠뻑 먹은 콩나물들처럼 쑥쑥 자라났다. 린다는 아이리쉬 댄스를 무척이나 잘 하는 아이였는데 나는 린다의 아이리쉬 댄스 대회에도 참가했었던 적이 있었다. 나비의 날개 같은 댄싱 드레스를 입은 린다는 가느다란 몸과 다리로 정말 호랑나비처럼 가볍게 춤을 추어 상을 타내곤 했다.

린다와는 반대로 춤에는 관심이 없는 제니퍼는 말타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말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에게 친절과 관심이 많은 소녀였다.

둘은 항상 지남철처럼 붙어 다녔다. 언제 어디서건 제니퍼를 보았다면 린다도 그 옆 어딘가에 있을게 틀림없었다. 둘은 언제나 다정했다.

얼굴에 항상 웃음을 담은 절딘, 이야기 꺼리가 늘 많아 말을 많이 하는 절딘은 어느날 그늘진 모습으로 그의 언니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결국 담배를 무척이나 많이 피웠다던 그의 언니가 폐암으로 죽었다는 부음을 기어이 듣고 말았다. 나는 한번도 절딘의 언니를 본적은 없었으나 절딘을 생각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참석한 장례식이었다.

그러잖아도 말주변이 없는 나는 이렇게 슬픈 날 어떤 말로 절딘을 위로해야할지 난감하여 그저 얼굴을 떨구고만 있었다. 마스(mass)가 끝나고 관을 따라 사람들은 교회 뒤뜰 무덤가로 나왔다. 신부의 마지막 기도와 함께 관은 깊게 파인 땅속에 내려짐과 동시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생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중년의 한 부인의 죽음을 서러워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내가 운 이유는 그 깊게 파여진 무덤가에 둘러선 죽은자의 가족들, 특히 그 중에서도 나이 많고 기력 없어 보이는 늙은 노파(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낳고 키우고 사랑하고 결혼하여 떠나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의 사연과 또한 아름다운 추억을 저 늙은 어머니는 안고 있을까. 우리 동양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이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라 할 정도로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일이련만, 자식을 새 흙 파서 묻고있는 저 늙은 어미의 마음이 어떠한 것일까, 과연 그 누가 저 어미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 나왔다.

썰린의 바닷가에서도 시골 한적한 길에서도 승마복과 모자를 갖춰 쓰고 말을 타는 제니퍼와 린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녀들 두 자매는 서양 영화에서나 나올 범직한 고르고 골라 선택된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까만 승마 바지를 입은 제니퍼의 긴 다리와 둥근 승마 모자 아래로 황금빛의 긴 노란 머리는 더없이 대조적이며 아름답기만 했다. 특히 썰린의 바닷가에서 말을 탈 때면 노을진 바다를 뒤 배경으로, 써걱써걱 모래밭에 부딪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승마하는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통통했던 제니퍼는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살이 빠지고 길쭉하게 늘어나 완전한 10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절딘의 오빠 부인의 사멸 소식을 들었다. 절딘을 대면할 일을 생각하니 오히려 민망하기만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노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제발 그 가엾은 노인이 절딘을 위해서라도 다만 1년만이라도 더 살아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나의 바램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오히려 그 가련한 노파의 부음을 너무 빨리 듣고 말았다. 자식의 주검 앞에 곧 터질 것만 같은 비눗방울 모습으로 서 있던 나이 많은 여자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갖고 몸이 불편하여 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2년 만에 장례식 셋을 치른 절딘은 그 이후 "죽음의 여행을 떠난 고양이(The Cat went to die)"라는 엣세이를 썼다.

수년간을 함께 식구로 지냈던 고양이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났다.

누군가로부터 절딘은, 그렇게 늙은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때가 되면 어디론가 떠나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정말 그 털이 희고 복스럽던 고양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니퍼와 린다는 가끔씩 우리집 베이비 씨터로 일하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그 두 자매의 모습을 나는 참 신기해했다.

절딘과 나는 서로 오가며 차 한잔과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하며 낯익고도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되었다. 그 날은 오랜만에 절딘의 방문을 받았다. 우리는 부엌에 앉아 아이를 키우는 공통된 엄마 입장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절딘, 제니퍼가 정말 몰라보게 성숙해 졌어요."

"네, 요즘은 남자 친구까지 생겨 아주 한참 무르익어 있죠."

"사춘기 소녀를 키우는 엄마는 더 힘들텐데 특히 성교육은 어떻게 시키나요?"

"그러잖아도 요즘 제니퍼가 별걸 다 물어봐요. 아빠가 첫 남자였느냐. 결혼 전에 아빠와 속도 위반을 했느냐 등등요"

"어머나 세상에, 그런 질문을 한단말이예요?"

"그럼요. 주미도 좀 더 커봐요. 그런 질문할 날 멀지 않았어요."

"별로 기다리고 싶지 않은 질문이네요. 그래서 다 답해줬나요?"

"물론. 적잖이 놀라기도 했지만 다 해줬지요.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무척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데 늘 조심하라고 당부해요. 사춘기 남녀가 육체적인 사랑에 휘말려들면 정말 위험한 일이지요. 무슨 일이 있으면 우선 엄마한테 말하라고 부탁해요"

"맞아요. 일일이 따라다니며 간섭할 수도 없고 그저 부탁하고 믿을 수 밖예요"

"요즘 제니퍼는 남자 친구를 아이템(Item) 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아이템이라고 하면서요."

"사람을 칭해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인데 요즘 유행어인가 보죠?"

절딘과 이런 대화를 하며 차를 마신 후 몇 주가 지나고 나서였다.

제니퍼가 뇌막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걱정스러웠지만 곧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날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심상찮은 이야기들을 했다. 제니퍼가 죽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것이 비록 소문일 뿐이었지만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감히 절딘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거나 할 염두도 내지 못했다. 정말로 제니퍼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절딘은 제 정신이 아닐 것이었다. 나의 방문이나 전화질은 위로는커녕 오히려 부담스러울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비단 나 혼자뿐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 모두 가슴만 조일 뿐 감히 어줍잖은 위로의 말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제니퍼의 소식을 알고자 물었으나 들리는 얘기는 한결같이 가망이 없다는 얘기뿐이었다.

제니퍼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제니퍼의 아버지인 카아알(Karl)은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아. 나한텐 절딘이 있고 서로 의지하지만 내 가엾은 린다는 어떡하라고. 이젠 그 옆에 아무도 없을 텐데. 어쩌면 좋으나...."

40대 중년의 남자의 두 눈에서 맺혔던 눈물이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린다의 충격이 얼마큼 컸는지는 린다의 기절과 입원이 잘 말해주고 있다. 충격에 의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어느 날 쓰러졌고 나머지 딸 마저 앰블란스에 실어 입원시켜야 하는 절딘과 카아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절딘은 제니퍼가 누운 병실 바닥에 쓰러져 잤고 눈을 뜨면 제니퍼의 손과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비비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긴 밤을 잠자고 아침에 부스스 깨어나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 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잠자는 사이 제니퍼는 열 일곱 번째 생일을 병실에서 누운 채 맞이하였고 몸이 회복된 린다는 제니퍼에게 옷을 입히고 목걸이를 걸어 치장시켰다. 수많은 생일 축하와 회복을 바란다는 카드들, 풍선, 곰인형(Teddy Bear)들로 병실은 꽉 메워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썰린 바닷가에 모여 기도 모임을 갖기로 했다. 썰린은 제니퍼와 린다가 어려서부터 늘 함께 말을 타고 즐기던 앞마당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하필이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고약스런 날이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쓰고 하나둘 모여들어 커다란 무리를 만들어냈다.

신부와 동네 사람들은 천주교 식 기도문을 외우고 제니퍼를 위해 기도했다. 신부는 이제 제니퍼가 우리 곁을 떠나야 할 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가 기뻐했던 것처럼 보낼 때도 그렇게 보내자고 했다. 신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부인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신부님! 우리는 제니퍼를 포기할 수 없어요. 제니퍼는 깨어날 거예요. 이별의 인사를 하자고 말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신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을 뿐이었고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실이든 사실이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일 경우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믿고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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